팔영산의 웅장한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천년고찰, 능가사.
이곳은 417년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보현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지만, 1644년 벽천대사에 의해 중건되면서 오늘날의 ‘능가사’로 다시 태어난 곳이다.
보물 제1307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보물 제1557호인 동종 그리고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제224호 사천왕상은 오랜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어 가치가 크다.
팔영산 중턱에 보현암(普賢庵)이 언제부터인지 창건되어(아도화상이 포교를 하기 위하여 한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이 있음) 뒤에 보현사로 불리게 되었다.
이 보현사가 뒤에 능가사로 되었다고 능가사 사적비(楞伽寺 事蹟碑)에서 밝히고 있으나 지리지류(地理誌類)에서는 서로 다른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능가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옳음) 때에 왜군에 의해 불에 타 버려 폐찰이 되었다고 한다.
인조(仁祖) 22년 황명숭정갑신(皇明崇禎甲申 : 1644) 정현대사(正玄大師)가 하안거(夏安居, 4월 중순에서 7월 중순까지 90일 동안 승려들과 방에 모여 수도함)를 하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그것은 한 신승(神僧)이 나타나서 '장부(丈夫)로 태어나 부처가 되기 어려우므로 마땅히 대공덕주(大功德主)가 되어 종풍(宗風)을 홍포(弘布) 하겠다'는 꿈을 꾼 것이다. 이에 정현대사는 광희사(廣熙師)와 함께 산을 살펴보게 되었다. 산의 남쪽에 옛 절터를 발견하여 전각·요사채·불상·탱화·종각·목어각 등 불사를 함으로써 정현이 창건주가 되어 능가사를 시창하였던 것이다. 이는 모두 꿈에서 취한 것이었다.
그 뒤 정현대사가 멸도(滅道 :入寂)하게 되자 그의 제자 민정(敏淨), 의헌(義軒), 상기(尙機) 등이 스승의 유지를 따라 문(門)의 요사채를 단청 불사함으로써 사찰 면모를 일신하였다.일련의 사찰 당우 불사가 이루어지자 사승(寺僧) 수명(透明)이 능가사의 사적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천리를 달려 통정대부홍문관 부제학 (弘文館 副提學) 오수채(吳遂采)에게 청문하여 숙종 16년(1690) 능가사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비음기는 고흥 출신 승려 영해약탄(影海若坦,1668~1754)이 지었다.
능가사의 소속 암자는 서불암(西佛庵), 만경암(萬景庵) 이었다. 서불은 능가사의 별암 가운데 으뜸가는 암자로 옛날에는 서불사의암(西不思議庵)이라 불리다가 서불암 혹은 서암(西庵)으로 불리워졌다. 옛날 보현사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설암(雪岩)의 제자인 성진(性眞)이 1894년 신기선(申箕善)에게 능가사 서불암 중수기(楞伽寺 西佛庵 重修記)를 청하였다. 만경암은 벽오(碧梧)와 그의 제자 설암·의관(儀觀)·형연(炯然)이 머물렀던 암자이다.
신라 눌지왕 원년 아도화상이 주석했다고 하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옛날에는 보현암 이었는데 만경암으로 고쳐 불렀다. 이 암자도 벽천사 정현(碧川師 正玄)이 지었는데 인조 22년(1664)에 네 차례나 개수하였다. 철종 8년(1857)에 선사(禪師) 기성당(綺城堂)이 경신하였다.
암자 당우가 1900년(庚子) 봄에 화재를 만났으나 견송(見松), 명학(暝鶴)이 회향(廻向)하였다. 한둘 승려가 발원.모연(發願.募緣)하여 3년이 지난 1902년(壬寅) 겨울에 겨우 원루(院樓) 전방(殿房)을 엮어 한꺼번에 전제(前制)를 열어 광장(廣壯)하였다고 한다. 1918(戊午)에 만경암을 중수하고 그 기념비를 대웅전 옆에 건립했다. 능가사의 승려 익순(益淳)은 범패(梵唄)에 능하였는데 그의 문도가 크게 성하여 널리 퍼져 있었다.
편백나무수으로 둘러싸인 산사에서 하루를 보내며 지친 심신을 치유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 템플스테이 1. 당일형: 매일 / 20,000원(성인, 학생), 10,000원(미취학)
- 템플스테이 2. 체험형: 1박2일 / 100,000원(성인), 60,000원(학생), 미취학(무료)
- 템플스테이 3. 휴식형: 1박, 2박 / 1박당-70,000원(성인), 40,000원(학색), 미취학(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