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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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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섬, 예술의 섬 연홍도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된 연홍도는 그 속에 자그마한 미술관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의 섬’이란 주제로
섬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이다.
  • local_phone 연락처

    010-5064-0661

  • location_on 소재지

    전남 고흥군 금산면 신촌리 1421-5(신양선착장)

면적 0.55km², 해안선 길이 4km이며 거금도 서쪽 1km 해상, 거금도와 금당도 사이에 연홍도가 있다. 원래는 돌산현에 속했으나, 1895년 행정구역을 개편함으로써 고흥군 금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300여 년 전쯤 밀양박씨가 처음으로 입도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거금도 서쪽 끝 신양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5분쯤 떨어진 곳에 작은 섬 연홍도가 있다. 연홍도는 면적 0.55㎢의 작은 섬으로, 폐교를 개조하여 만든 연홍미술관, 마을 골목마다 예쁘게 단장된 담장 벽화와 바다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휴식공간이다. 인근 바다는 빠른 조류와 깊은 수심의 득량만 수역의 나들목으로 갯바위 낚시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다.

넓은 바다에 떠 있는 연(鳶)과 같다 해서 연홍도(鳶洪島)라고 불렀으나, 일제강점기에 거금도와 맥이 이어졌다 하여 연(鳶)’ 자를 이을 ‘연(連)’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섬의 지형이 말 형상이라 마도(馬島)라 불렀다는 설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ㄱ’자 모양의 연홍도는 최고점 81m로 경사가 완만한 구릉형 산지이다. 대부분의 해안은 사질 해안이나, 곳곳에 암석해안도 있다. 1월의 평균 기온은 0℃, 8월 평균기온 26℃, 연 강수량 1,389㎜이다. 녹동항 또는 거금도 신양선착장에서 연홍도로 들어가는 배를 탈 수 있다.

‘지붕이 없는 미술관‘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연홍도(鳶洪島)

어업에 종사하는 6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대다수 가구가 어업과 농업을 병행하고 있어 연홍도에는 많은 밭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가구가 농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지금도 소를 이용해 밭을 경작하는 전통이 있어 운이 좋으면 쟁기로 밭을 가는 촌로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보리·콩·녹두·양파·마늘 등이 주요농산물로 나오며, 근해에서는 멸치·노래미·낙지가 잡힌다. 김·미역·톳의 양식도 이루어진다. 서쪽의 모래 해변에는 동백나무·곰솔 등이 무성한 해수욕장이 있다.

멀리서 보면 부메랑처럼, 혹은 가오리처럼 사람들의 맘을 설레게 만드는 오묘한 매력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연홍도는 2015년 전라남도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된 국내 유일의 섬 속에 미술관이 있는 곳이다. 2시간 남짓 걸리는 섬 둘레길은 수려한 해변 풍경과 더불어 기암괴석의 향연이라 이곳을 찾는 연인들과 가족 방문객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이곳을 다시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작은 섬이지만 연홍도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온다. 원래 연홍도에는 선착장이 없었다. 1940년대 어려운 시절, 마을 청년들이 스스로 하나둘씩 힘을 모아 선착장을 만든 결과 남도에서 유일한 어장 선창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 1960년 군사정권 시절, 마을 주민 김대규 씨가 주민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마련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아 제방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어 지금은 금산면의 가장 넓은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 등은 연홍도가 외형적으로만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마음의 섬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웃의 거금도와 맥이 이어져 있다 하여 이을 연(連)자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름이야 어떻든 연홍도는 관광객들의 가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도선시간표

관람료
하계시간 (4월 ~ 9월) 동계시간 (10월 ~ 3월)
연홍도 출항 신양 출항 연홍도 출항 신양 출항
07 : 55 08 : 00 07 : 55 08 : 00
09 : 45 09 : 50 09 : 45 09 : 50
11 : 00 11 : 05 11 : 00 11 : 05
12 : 30 12 : 35 12 : 30 12 : 35
14 : 30 14 : 35 14 : 30 14 : 35
16 : 00 16 : 05 16 : 00 16 : 05
18 : 00 18 : 05 17 : 30 17 : 35

도선·탐방비 이용요금

◦ 도선비(왕복) : 2,000원
◦ 탐방비 : 3,000원(성인), 1,000원(소인)

연홍 마을식당 및 숙소예약 : 사무장 010-5064-0661

◦ 연홍미술관 : 010-7256-8855
◦ 선 장 : 010-8585-0769

연홍도 관광안내소 : 061-842-0177

연홍미술관

큰 섬(거금도)에 딸린 작은 섬(연홍도)의 미술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정식 명칭 ‘섬in섬 연홍미술관’은 1998년, 폐교된 연홍분교장을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꾸며 2006년 11월 개관한 작은 미술관이다.

섬 출신의 예술가 김정만(80세) 화백이 폐교된 학교를 수리하여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김정만 화백은 순천에서 순천 중학교에 다니면서 여수 순천 사건을 겪었고, 이후 육군 대령으로 복무하다 제대 후 어릴 적 꿈이었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홍익 대학교에서 만학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고향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섬에 들어와 고향의 산과 바다 등을 화폭에 담고 있다. 김 화백은 지금도 일종의 사회사업 차원으로 자신이 손수 그린 작품을 지역과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기증하고 있다. 미술관 관장 선호남(50) 관장은 연홍 미술관을 ‘아름답고 멋진 섬 마을의 미술관’이라고 소개했다. “도시에는 여기보다 훨씬 더 잘 갖추어진 사설 미술관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아름다운 남해를 정원으로 삼은 미술관은 여기가 전국에서 유일할 겁니다.”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인 선 관장은 고흥 민예총 사무국장 시절 연홍미술관을 개관한 김정만 화백과 만나 5년 전부터 연홍미술관의 운영를 맡고 있다고 한다. 선 관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해안에 널려진 몽돌을 주워 미술관 앞마당에 깔고, 전시실에 소품들을 채워 넣고 있다. 또한 관장은 소득이 없는 가난한 이곳 주민들을 위해 꽃 축제도 구상하고 있었다. 연홍도를 나무와 조경, 조각으로 이름난 거제도의 관광지 외도처럼 테마가 있는 “미술의 섬”으로 만들고 싶다는 선 관장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연홍도 어디를 가더라도 그림과 조각을 쉽게 볼 수 있다. 올해로 개관 15년을 맞는 연홍미술관은 150여 점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며 섬과 바다와 고흥을 주제로 특별전을 꾸준히 열고 있다. 그동안 고흥 녹동항에서 하루 한 번 오는 배, 금진항에서 산양마을로 차를 타고 와서 나룻배를 타고 오가는 등의 불편한 접근성을 가지고 있던 연홍미술관은 거금대교의 개통으로 수월한 접근이 가능해져 작년 무려 3000여 명의 달하는 관객을 맞이했다고 한다. 연홍미술관은 배를 타는 기쁨과 휴식, 숙박을 겸하하여 연홍도의 아름다움과 거금도, 소록도의 풍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특장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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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교실 2동과 관사를 개조하여 면적 165m²의 전시실. 숙소와 식당 등을 만들었고, 현재 연홍미술관에서는 회화작품 150여 점이 교체전시되고 있다. 또한 연홍미술관은 예술인들의 단체연수, 체류하는 예술인들의 창작활동, 주민들의 생활복지 시설로도 활용되고 있다.

미술관 마당에는 꽃밭과 쉼터가 만들어져 있고 마당 앞으로 펼쳐진 바다 건너편으로는 금당도(金塘島)가 보인다. 미술관 뒤편에는 몽돌이 펼쳐지는 해변과 갯벌, 300m 떨어진 곳에 백사장도 볼 수 있다.

연홍 선창을 쌓는다.

1940년의 연홍도는 여름철에 태풍이 불고 겨울철에 강풍이 불면 주민의 생명이며 재산인 해태채취선을 은신할 곳이 없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산 등으로 밭 가로 온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끌어올려야 했다. 일제식민지 시대의 주민 복지정책은 전무한 상태였으나, 도로부터 낙도방파제 허가 제2호를 받고 해태조합에서 국고보조금을 지원받고 또 부족한 예산은 마을의 육종포(가사리, 세모, 김, 파래, 톳, 미역) 매도대금 일부를 투자하여 2개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동편 방파제 125m와 선착장 60m를 완공하여 도내에서 유일하게 맛도(연홍도)만이 어장선창을 갖게 되었다.

80년이 지나도록 사라호 태풍(1959년) 같은 무서운 바람이 수차례 불었어도 끄떡없이 내려온 방파제를 보면 선인(先人)들의 피땀 어린 노고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사 시공 중 큰 돌을 운반하고 쌓은 것은 청부를 맡은 목도 꾼들의 몫이지만 골재를 운반하는 작업은 모두가 주민들의 부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역 나오시오”하고 동사(洞使)가 욋소리를 하면 마을 청년들은 열 일 버리고 이 대역사에 기꺼이 동참하였고, 장비도 없이 등짐으로만 돌을 날라 어깨 등판이 헤어져도 노임을 주는 사람도 없었고, 점심을 줄 예산도 없었다.